피카츄를 잡던 손이, 드론을 인도하기까지
Source: Platum
동의의 경계에 관하여

2016년 여름,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잡으러 다녔다. 횡단보도 앞에서, 공원 벤치 옆에서, 회사 비상계단에서 사람들은 허리를 숙이고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생물이 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향해 손가락을 휘둘렀다. 잡다. 그 여름의 동사는 명백히 능동태였다. 우리가 잡는 쪽이었고, 세계는 잡히는 쪽이었다.
10년이 지나 그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가 뒤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가 포켓몬을 잡는 동안, 세계는 우리를 – 정확히는 우리가 비춘 거리와 건물과 골목을 – 스캔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어 올린 그 단순한 동작 하나하나가 현실 세계의 3차원 지도를 짓는 벽돌이 되었다. 능동태인 줄 알았던 행위는, 돌이켜 보면 거대한 수동태의 일부였다.
놀이의 데이터가 전장의 지도가 될 때
네덜란드 일간지 트라우(Trouw)의 보도로 알려진 사실관계는 이렇다. 전 세계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하며 남긴 스캔은 약 300억 건에 이른다. 이 데이터는 지금 나이언틱 스페이셜(Niantic Spatial)이라는 회사가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그 나이언틱이 아니다.
포켓몬고를 만든 나이언틱은 2025년, 게임 사업부를 35억 달러에 사우디 자본의 스코플리(Scopely)에 넘기면서 사실상 두 동강 났다. 게임이라는 ‘몸’은 팔려 나가고, 그동안 게임이 길어 올린 ‘데이터’와 그것을 학습한 지리공간 AI 모델은 나이언틱 스페이셜이라는 별도 법인으로 떨어져 나왔다. 창업자 존 행키가 이끄는 이 회사가 만드는 것은 ‘대규모 지리공간 모델(LGM)’ — GPS 신호가 끊긴 곳에서도 시각 정보만으로 자기 위치를 아는 시각측위시스템(VPS)이다.
GPS는 교란할 수 있다. 적의 드론을 엉뚱한 좌표로 보내는 재밍(jamming)은 이미 현대 전장의 일상이다. 그러나 눈으로 본 풍경을 지도와 대조해 위치를 잡는 VPS는 교란되지 않는다. 위성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골목 산책이, 누군가의 점심시간 포켓몬 사냥이, 위성이 무력화된 전장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기계의 눈이 된 셈이다.
지난해 12월, 나이언틱 스페이셜은 밴터(Vantor)와 손을 잡았다. 밴터는 낯선 이름이지만 그 전신은 낯설지 않다. 위성영상 기업 맥사 인텔리전스(Maxar Intelligence)가 2025년 10월 새로 단 간판이다. 그리고 이 회사는 이미 ‘Raptor’라는 제품을 갖고 있다. GPS 없이 작동하는, 드론에 통합되는 소프트웨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거기에 놓인다.
물론 양쪽 모두 신중하게 말한다. 밴터는 포켓몬고 데이터를 직접 쓰지는 않는다고 했지만, 자사가 배치할 모델이 그 스캔으로 학습됐는지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나이언틱 스페이셜은 “초기 버전” 모델 학습에 게임 스캔을 썼다는 점은 인정하면서, 플레이어들이 약관에 자발적으로 동의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사와 파트너들이 인권과 윤리 원칙을 존중하며 책임 있게 제품을 쓰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자발적 동의’의 실체는 들여다볼수록 빈약하다. 게임을 하려면 받아들여야 했던 그 약관에는, 플레이어가 남긴 스캔을 제3자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양도·재실시가 가능한 라이선스를 회사에 넘긴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바로 이 문장 — “플레이어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했다” — 에서 모든 질문이 시작된다.
국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위험이 한 번도 숨겨진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자발적 동의’를 했다는 그 플레이어들이 떠안은 위험을, 정작 국가들은 이미 10년 전에 거부했다.
게임이 출시되던 2016년 여름, 세계의 여러 정부는 카메라를 든 손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챘다. 이란은 그해 8월, 안보를 이유로 포켓몬고를 가장 먼저 전면 금지했다. 이스라엘군은 그해 여름 군 기지 내 플레이를 금지하며 경고했다 — 게임이 스마트폰의 카메라와 위치 서비스를 켜는 탓에 기지 위치와 사진 같은 민감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다고. 쿠웨이트는 전략 시설 접근에 ‘무관용’을 선언했고, 중국은 국가 안보와 국민 안전을 들어 시장 진입 자체를 막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경계는 예언에 가까웠다. 카메라를 현실에 들이대는 행위가 곧 정찰이라는 것을, 국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군 기지를 봉쇄했고, 전략 시설에 빗장을 걸었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아무도 빗장을 걸어 주지 않았다. 군대가 자기 기지의 노출을 걱정하는 동안, 횡단보도 앞에서 허리를 숙인 시민이 비추던 골목과 집과 거리에는 누구도 경고를 보내지 않았다. 국가는 알아챘고, 시민은 체크박스 하나를 받았다. 그 비대칭이야말로 ‘자발적 동의’라는 말의 가장 깊은 허점이다.
111111
우리가 누른 ‘동의’는 어디까지 갔나
동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점(點)으로 다룬다. 약관 화면 맨 아래의 체크박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완결되는 사건. 그러나 데이터는 점이 아니라 선(線)으로, 아니 면(面)으로 산다. 2016년의 체크박스 하나가 2026년의 전장까지 흘러가는 동안, 그 동의는 단 한 번도 갱신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시제다. 동의는 과거의 한 시점에 묶여 있는데, 그 동의가 허락한 데이터는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다. 2016년 여름, 횡단보도 앞에서 허리를 숙였던 그 누구도 ‘드론’이나 ‘재밍’이나 ‘시각측위’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들은 아직 이 세상의 문법에 없던 말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용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동의할 수 있단 말인가.
TU델프트의 기술윤리학자 예룬 판 덴 호번은 트라우에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게이머의 스캔이 없었다면 이 시스템의 개발이 이토록 빨라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플레이어들은 간접적으로, 어쩌면 미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군사적 응용에 기여했다고. 그 ‘미미함’이야말로 이 사안의 가장 정교한 함정이다. 한 사람의 스캔은 무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2억 명의 무의미를 합치면, 그것은 전장의 지도가 된다. 책임은 무한히 분할되어 결국 아무에게도 남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가담했고, 그래서 아무도 가담하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거울 ― 동의를 넘어선 자리
그렇다면 우리 법은 이 경계를 어떻게 그어 두었을까. 거울에 비춰 보면 풍경은 한층 더 복잡하다.
올해 1월 22일,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이른바 AI 기본법이 시행됐다. EU에 이어 세계 두 번째 포괄 규제라는 수식이 붙었지만, 그 성격은 ‘규제’보다 ‘진흥’에 방점이 찍혀 있다. 고영향 AI와 생성형 AI 사업자에게 투명성·안전성 의무를 지우되, 산업의 발목을 잡지 않으려는 균형 감각이 법의 뼈대다.
주목할 것은 이 법이 그어 둔 투명성의 한계다. 시행령은 고영향 AI 사업자에게 학습용 데이터의 ‘개요’를 홈페이지 등에 게시하도록 했지만,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부분은 빼도 되고 어디까지나 ‘개요’에 그친다. 정작 신문협회를 비롯한 여러 주체가 요구한 것 — 어떤 출처의 데이터가 쓰였는지, 내 콘텐츠나 정보가 학습에 들어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의 공개 의무 — 은 끝내 담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한 AI가 정확히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그 안에 내 데이터가 있는지를 개인이 추적해 확인할 길은 여전히 없다. 포켓몬고의 사례가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그 300억 건의 스캔 가운데 내 것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짚어낼 제도적 손전등은 아직 우리 손에 없는 셈이다.
더 깊은 층위는 개인정보보호법에 있다. AI 학습을 위한 데이터 처리에서, 한국의 무게중심은 이미 ‘동의’에서 ‘정당한 이익’으로 옮겨가 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공개된 개인정보를 AI 학습에 쓰는 근거로 보호법 제15조 1항 6호의 ‘정당한 이익’ 조항을 제시한다. 정보주체의 일일이 동의를 받는 대신, ①목적의 정당성 ②처리의 필요성 ③이익형량이라는 세 관문을 통과하면 된다. 사업자의 이익이 정보주체의 권리보다 명백히 앞선다고 판단되면, 동의는 생략될 수 있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나이언틱이 그토록 강조한 ‘자발적 동의’는, 한국의 현재 프레임 안에서는 차라리 고전적이고 정중한 절차로 보인다. 우리의 법적 상상력은 이미 그 동의조차 필요 없는 길 — 정당한 이익이라는 우회로 — 을 닦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회로의 핵심인 ‘이익형량’은, 따져 보면 포켓몬고가 던진 질문과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무너진다. 미래의 용도를 알 수 없을 때, 누가 그 이익을 저울에 올릴 수 있는가. 2016년의 저울로 2026년의 무게를 달 수는 없다.
경계가 아니라 지평선
동의의 경계라는 말에는 함정이 있다. 경계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한 번 그으면 끝나는 선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데이터의 시대에 동의는 경계가 아니라 지평선이다. 다가갈수록 물러나고, 시점이 바뀔 때마다 위치가 달라진다. 우리가 2016년에 그은 선은, 2026년의 풍경 속에서 이미 저 멀리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길고 더 깨알 같은 약관이 답일 리 없다. 필요한 것은 동의의 건축을 바꾸는 일이다. 한 번 흘러간 데이터를 도로 불러올 수 있는 권리, 용도가 바뀔 때마다 다시 정당성을 입증하게 하는 절차, 그리고 무엇보다 ‘AI가 무엇을 먹고 자랐는가’를, 그 속에 내 데이터가 있는지를 추적해 물을 수 있는 투명성. AI 기본법이 끝내 채우지 않은 바로 그 자리다.
피카츄를 쫓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 그들의 여름 오후는 어딘가의 전장에서 좌표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끝내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동의했는가가 아니다. 동의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이 일에 어울리는 말이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