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이 강이 되려면
Source: Platum
우리은행 영업점에 붙은 국민성장펀드 판매 종료 안내문. 5대 은행 2200억 원어치가 반나절 만에 소진됐다. (c)플래텀
판매 개시 10분 만에 온라인 물량이 동났다. 은행 영업점 앞에는 개점 전부터 대기 줄이 늘어섰고, 5대 은행 2200억 원어치는 반나절을 버티지 못했다. 국민참여형 국민성장펀드 첫날의 풍경이었다.
오픈런은 언제나 시대를 읽는 단서다. 2021년의 오픈런이 유동성 과잉과 자산 격차의 공포를 반영했다면, 오늘의 오픈런은 조금 다른 심리를 드러낸다. 최대 40% 소득공제에 분리과세까지, 절세 혜택이 투자 판단을 앞질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사람들은 ‘국민성장’이라는 이름 안에 담긴 약속을 믿고 싶어 했다. 내 돈이 나라의 미래를 키우고, 그 과실이 다시 내게 돌아온다는 서사-오랫동안 공모주 청약과 부동산 투자로만 체감할 수 있었던 그 서사를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시험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국민들이 새벽부터 줄을 선 것은 성장을 산 것인가, 안도를 산 것인가.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말 벤처 붐을 타고 시중 자금이 기술 창업 기업으로 쏟아졌고, 2000년대 중반 산업은행 정책금융과 2010년대 모태펀드의 확장으로 이어지며 정부는 오랫동안 자본시장을 산업 육성의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국민성장펀드가 이전 시도들과 다른 점은 규모만이 아니다. 올해 6000억 원, 5년간 3조 원. 사모재간접공모펀드 방식으로 모펀드 3개를 조성하고 이를 10개의 자펀드에 분산 투자한다. 이전의 정책금융이 주로 기관투자자와 전문 LP를 통해 움직였다면, 이번에는 은행 창구와 증권사 앱이 접점이다. 국민을 직접 LP로 끌어들이는 구조적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모태펀드가 씨앗을 심어온 20년이었다면, 국민성장펀드는 자란 나무를 숲으로 키우는 단계를 겨냥한다. 이미 검증된 기업을 글로벌 플레이어로 도약시키는 것. 그 자금의 방향이 투자처에서 드러난다.
리벨리온에 이어 두 번째 직접투자 대상이 된 업스테이지가 그 선언이다. 기업·정부용 AI 솔루션과 거대언어모델(LLM)을 개발하는 이 스타트업에는 한국벤처투자의 모태 자펀드가 초기에 220억 원을 투자했고, 이번 국민성장펀드가 총 5600억 원을 더했다. 씨앗을 뿌린 손과 나무에 물을 대는 손이 다르지 않다. 모태펀드에서 국민성장펀드로 이어지는 공공자금의 연속성-그것이 이 생태계 설계의 핵심이다.
정부는 씨앗 단계도 손보기 시작했다. 올해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창업시대 전략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테크 창업가 4000명과 로컬 창업가 1000명을 발굴하고, 최종 100명을 TV 오디션 형식으로 선발해 최대 1억 원을 지원하는 구상이다. 국민성장펀드가 이미 검증된 기업의 도약을 밀어올린다면, 모두의 창업 프로젝트는 그 아래 단계-아직 이름 없는 창업자들이 첫 발을 내딛는 구간-를 겨냥한다. 씨앗 단계와 스케일업 단계를 두 개의 정책으로 분리해 동시에 설계한 것이다.
5년 만기 폐쇄형 구조는 스케일업 단계의 기대를 뒷받침한다. 일반 VC 펀드의 회수 압박 없이 장기적 관점의 투자가 가능하고, 공공자금을 품은 운용사가 포트폴리오 기업을 발굴하는 것 자체가 민간 VC의 후속 투자를 이끄는 신호로 작동한다. 스케일업에 성공한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트랙레코드를 쌓으면, 그것이 다시 초기 창업자들에게 가능성의 좌표가 된다.
자금의 규모와 구조를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해도, 창업이 매력적인 선택지로 인식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마중물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 빈칸은 펀드가 채울 수 없다. 한국 정책금융의 역사도 낙관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자금이 특정 기업에 집중될 때, 민간 투자의 판단력이 공공의 승인 도장으로 대체될 때, 회수 기준과 성과 지표가 모호한 채로 집행될 때-마중물은 강 대신 웅덩이를 만들어왔다. 그 경계가 이번에도 유효한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마중물은 펌프를 작동시키지만, 물이 올라오려면 지하에 물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업에, 어떤 기준으로, 어떤 속도로 자금이 닿는지-그 집행의 질이 오늘의 열기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다. 첫날 완판은 신뢰의 예약이지, 성과의 보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