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샌드박스는 약속했지만, 출구는 없었다

발행: (2026년 2월 10일 오후 07:01 GMT+9)
11 분 소요
원문: Platum

Source: Platum

먼저 뛰어든 자에게 출구는 있는가

규제 샌드박스라는 제도의 설계는 명쾌하다. 기존 규제로는 시도조차 어려운 혁신을 스타트업이 먼저 실험하고, 시장성과 안전성이 검증되면 제도권으로 편입시킨다. 위험은 먼저 뛰어든 자가 감수하되, 그 보상으로 제도화의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암묵적 약속이다.

그런데 실험이 끝나고 제도화의 문이 열리는 순간, 그 문 앞에는 실험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유의미한 실적을 내지 못한 대형 기관들이 서 있다. 루센트블록이라는 한 스타트업의 사연이 국정감사와 대통령 발언, 그리고 1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까지 올라온 이유는, 이 구조가 한국 규제 샌드박스의 태생적 결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험체의 운명

경과를 정리하면 이렇다.

  • 루센트블록은 2018년 창업 후 2021년 금융위원회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돼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소유’를 운영해왔다.
  • 7년간 350억 원 이상을 투입하고, 50만 명의 이용자를 확보했으며, 11개 자산을 유동화했다.
  • 금융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 조각투자라는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국가를 대신해 증명한 셈이다.

문제는 이 실험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더 큰 경쟁자를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금융위가 지난해 9월 STO 장외거래소 인가를 최대 2곳에 부여하겠다고 발표하자, 한국거래소‑코스콤 컨소시엄과 넥스트레이드‑뮤직카우 컨소시엄이 인가 전에 뛰어들었다. 올해 1월 7일 증권선물위원회 심의에서 이 두 곳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왔다. 7년간 시장을 일군 스타트업은 밀려날 처지에 놓였다.

약속은 어디에

금융위가 스스로 밝힌 제도 취지와 결과 사이의 괴리가 논란의 핵심이다.

  • 금융위는 이번 인가가 “금융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운영되어 온 시범 서비스를 제도화”하는 과정이라고 명시했다.
  • 샌드박스 사업자에게 심사 가점을 부여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하지만 심사 결과는 그 취지와 어긋났다.

금융혁신지원특별법 제23조가 규정하는 ‘배타적 운영권’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이 조항은 혁신금융서비스 사업자가 정식 인허가를 받을 경우 최대 2년간 독점 운영을 보장하는 규정이다. 그러나 인가 자체를 받지 못하면 이 권리는 애초에 발동할 수 없다. 법 조항은 존재하되, 실질적 보호 장치로는 기능하지 못한다.

금융당국은 “인가 자체는 과거의 공로가 아니라 미래의 적격성을 심사하는 것이며, 자본금·인력·시스템 안정성 등 객관적 기준을 충족하는지가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일반적인 인허가 체계에서는 이 논리가 타당하지만, 금융위가 이번 인가를 샌드박스의 제도화라고 정의하고 참여자에게 가점까지 약속한 이상, 실험과 인가는 별개라는 주장은 자가당착이다. 제도화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놓고, 정작 그 문을 통과하는 기준은 실험과 무관하게 설계된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한국 규제 샌드박스의 구조적 결함이다. 실험 단계에서 제도화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즉 ‘출구’에 대한 설계가 부재하다. 샌드박스는 “들어가는 문”은 만들어놨지만 “나오는 문”, 즉 실험을 마친 사업자가 제도권으로 안착하는 경로를 명확히 보장하지 않는다. 인가 심사는 기존 금융업 인가와 동일한 잣대로 진행되고, 인력·자본·인프라에서 대형 기관을 이길 수 있는 스타트업은 구조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정치가 바꾼 것, 정치가 바꿀 수 없는 것

이 구조적 문제가 정치적 압력으로 임시 봉합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루센트블록이 1월 1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공정성 논란을 제기한 이후, 사안은 빠르게 정치화됐다.

  • 이재명 대통령은 1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인허가 절차에 대해 최대한 투명하게,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직접 언급했다.
  • 금융위는 1월 14일과 28일 두 차례 정례회의에서 안건 상정을 보류했고, 당초 2곳 인가 방침에서 3곳 모두 인가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의 발언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박범계 의원은 지난 5일 자신의 SNS에 “이것은 사실상 합법적 기술탈취”라며 “정부가 조각투자거래를 혁신기업에 맛보게하고 맛이 좋으니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맛없다고 뱉어버리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구단주가 선수로 뛰는 것”이라고 비유했던 것보다 한층 강한 표현이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취지에 공감한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10일에는 장철민 의원(더불어민주당, 대전 동구)이 대정부질문에서 “회사가 문 닫는 결정이 나오면 고객들이 너무 어려워진다”며 재검토를 촉구했다.

정치권의 개입이 루센트블록이라는 한 기업을 살릴 수는 있다. 그러나 샌드박스 제도의 구조적 결함을 고치지는 못한다. 3곳 모두 인가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해도 그것은 이번 사안에 대한 해법일 뿐, 다음 번 샌드박스 졸업생이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면 정치적으로 해결된다”는 선례만 남길 수 있다.

진짜 피해자는 누구인가

논란이 장기화되면서 정작 시장 자체가 멈춰 서고 있다.

  • 금융당국의 ‘발행과 유통 분리’ 원칙에 따라 기존 샌드박스 업체 6곳 중 카사, 펀블, 뮤직카우 등 5곳은 발행을 선택했고, 루센트블록만이 유통(장외거래소) 인가에 도전했다.
  • 발행사들은 상품을 만들어놓고도 유통 플랫폼이 없어 출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증권선물위원회 심의가 끝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금융위 정례회의 의결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11일 정례회의에서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있으나, 추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인가 지연이 길어질수록 STO 시장 출범의 골든타임은 흘러가고, 초기 생태계의 동력은 약해진다.

결국 이 사안은 루센트블록 한 기업의 생존 문제를 넘어, 한국이 혁신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국가가 “먼저 뛰어들라”고 권유한 실험에서, 실험체에게 주어지는 것이 명예뿐이라면 다음 실험에 뛰어들 스타트업은 없다. 샌드박스의 ‘출구’를 설계하는 것—이것이 11일 금융위 정례회의보다 더 근본적인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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